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문단 편집) ==== [[데탕트]] 체제의 주역이 되다 ==== >"브레즈네프는 고르바초프로의 이행에 필수적이었다. 브레즈네프는 고르바초프가 성취한 것을 도입했다. 브레즈네프는 [[세계평화]]의 자산이었다." >---- >에곤 바르[* 서독 [[빌리 브란트]] 총리의 비서로 활동해 [[동방 정책]]을 구상한 인물이다.] >"그는 선의를 갖고 행동했지만, 상대의 속임수에 굴복하지는 않았고 조금이지만 정중하게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그는 항상 재치있는 농담을 통해 긴장감을 해소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브레즈네프는 공식적인 오찬 회동중에도 기꺼이 비공식적인 대화를 하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출처 Святослав Рыбас. Громыко. Война, мир и дипломатия. — М.: Молодая гвардия, 2011.] >---- >[[안드레이 그로미코]] 소련 외무장관 >'''"만사가 잘 되고 있습니다. 결국 승리하는 세력은 전쟁 세력이 아니라 평화 세력입니다."'''[* 브레즈네프는 [[미국]]과 [[데탕트]]를 통해 [[세계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의 건강이 허락하는 한 전쟁을 피하고 세계평화를 위해서라면 끝까지 진력하는, 의외의 성향을 보였다. 후술하듯 군사개입을 최대한 피하였고 아프간전 개입에도 부정적이었다.] 군비를 늘린 행보와 [[대리전]]을 통해 미국을 곳곳에서 괴롭힌 것과 별개로 미국, 서방 세계와 대립을 완화시키는데 주력했고, 실제로도 그는 서방세계와 정면대립은 피하려 했다. 이는 브레즈네프가 독소전 시기 사단장급 정치인민위원으로서 호된 전투를 직접 경험한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캅카스로부터 카르파티아 산맥에 이르기까지 군대와 함께 행군을 하면서 전쟁의 참상을 보며, 전쟁에서의 승리보다 그 대가가 훨씬 크다는 것을 확고히 믿게 되었다.[* 브레즈네프의 아버지 또한 [[반전]]적인 모습이 강했으며, 브레즈네프도 이 영향을 받아 줄곧 아버지 얘기를 했다고 한다.] 이런 브레즈네프에게 있어 [[흐루쇼프]]의 [[벼랑 끝 전술]]과 위기도발 행위는 깊은 혐오의 대상이었으며, 이를 극복하고 [[세계평화]]를 위한 토대를 확고히 구축하는 것이 브레즈네프 대외 정책의 주요 동기가 된다. 그로미코의 증언에서 볼 수 있듯이 공식적인 외교 석상에서 거침없고 호탕한 언사로 서방세계를 압박하길 즐겨했던 흐루쇼프와 달리 브레즈네프는 정중한 태도로 상대방의 호감을 사도록 노력했고 그 덕에 서방과의 대립을 완화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와 여러 번 정상회담을 거치며 서방과 동구권의 긴장 완화에 주력했다. 당시 미국과 서방은 균열과 분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지만 이는 소련도 마찬가지라 [[프라하의 봄]]과 [[중소국경분쟁]] 그리고 소련의 경기 침체로 인해 [[니키타 흐루쇼프]] 처럼 공격적인 대서방 외교를 취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브레즈네프는 이런 긴장을 원하지 않았다.[* 브레즈네프 시기 세계 공산당에 대한 지령도 폭력 투쟁을 반대하며 평화 투쟁을 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체 게바라]] 같은 폭력 투쟁을 주장하는 혁명가를 적대하는 영향도 생겼다.] 그렇기에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과 함께 냉전시대 [[데탕트]] 체제의 주역으로써 활동하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의 '미국 정상과의 관계'에서 서술. 이런 해빙무드 덕에 서방과의 무역도 늘어났고, 반미 선전이 넘쳐났던 소련 뉴스들은 그 자취를 감추고 미국에 대한 긍정적인 내용들이 나왔으며, 서방 문화에 대한 제재도 풀어서 인민들은 미국 팝과 [[비틀스]]의 노래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화기애애한 두 정상을 보며 사람들은 냉전 체제가 머지 않아 종식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품기도 했다. 하지만 1974년 미국의 리처드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추락함을 계기로 미국 내 반데탕트 세력이 점점 늘어나게 된다. 닉슨이 사임 하기 얼마 전 닉슨이 브레즈네프에게 소-미 독트린을 통해 세계평화를 구축하자는 황당한 제안을 했다.[* 이는 브레즈네프의 꿈이기는 했지만 당연하게도 대외적, 대내적 형편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브레즈네프가 서방과의 데탕트에 자신의 정치적 자산을 쏟아부은 결과 [[1975년]] 8월 1일, 핀란드 [[헬싱키]]에서 체결된 헬싱키 협정에 다른 [[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들과 함께 참가해 서명할 수 있게 되었다. 헬싱키 협정에 인권 보장과 같은 소련 체제에 부담이 되는 조약 내용도 있었지만 브레즈네프는 그보단 양대 초강대국으로써의 위상을 전세계에 알리는 것이 자국에게 이익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소련은 '내정 불간섭'이라는 조항을 근거로 공산주의 체제 내에 대한 서방 세계의 개입을 차단하는 것으로 활용했으며[* [[브레즈네프 독트린]]도 당연히 폐기하지 않았다. 그 덕에 [[1981년]]에 폴란드 연대노조를 탄압하며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의 계엄령을 적극 지지해 서방세계로 부터 비난을 받았다.] '영토 보전' 조항을 근거로 [[발트 3국]]을 자국에 종속시킨 것이 합법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물론 미국은 해당 협정과는 별개로 소련의 [[발트 3국]] 귀속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정치국 내 보수적인 인사들은 협정에 매우 실망하였다.] 요약하자면 '인권 존중'과 같은 소련 체제에 있어서의 마이너스 요소가 있는 협정임에도 브레즈네프 자신의 정치적 자산 그리고 소련의 명분을 위해 헬싱키 협정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명시한 헬싱키 협정에 참여한 덕에 서방과 동구권의 긴장은 완회되었고 브레즈네프는 자신의 정치적 치적이 마련되었다고 기뻐했다. 이후 1977년, 프랑스를 방문해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국제 긴장상태 완화와 핵무기의 확산을 방지하자는데 양국이 공감대를 가졌고 성공적인 공동성명을 발표하면서 데탕트 체제는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공산주의 체제 내부에서는 점점 반체제 운동이 되살아나며 균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게다가 1977년, 미국에 [[지미 카터]] 행정부가 새로 들어선 이후 한동안 개선되던 미소간 관계는 다시 균열을 보이기 시작한다. 지미 카터 행정부의 국가안보보좌관은 폴란드 출신인 [[즈비그니에프 브레진스키]]였는데, 러시아가 폴란드에 자행한 탄압과 폭거의 역사를 경험해서 그런지 대소 강경파였고 인권을 강조하던 지미 카터도 소련을 결코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브레즈네프가 애써 구상한 초강대국 데탕트 체제는 점점 무너져내리기 시작한다. 브레즈네프도 1978년에 모스크바를 방문한 미국 상원의원 사절단에게 '''핵전쟁이 발발하면 미국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며 미국의 대소 강경파에게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7811180032920200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8-11-18&officeId=00032&pageNo=2&printNo=10196&publishType=00020|#]] '''그리고 앞선 균열들은 애들 장난으로 보일 정도의 초대형 사고가 터져버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